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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23시 59분

'그런데도 절 죽이실 건가요?'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의 내가 잠에 들었는지 아니면 멍때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귀를 간지럽힌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번째 깜빡임에 흐릿했던 초점이 제대로 잡혔다. 눈동자만 굴려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로비에 어지럽게 쌓인 상자가 시야에 잡혔다. 나는 오른 다리를 꼰 채, 상자 위에 앉아있었다. 구석진 곳엔 거미줄이 가득했다. 로비를 가로지르듯 설치된 선반 위에는 모두의 공간이 자리했다. 라더의 어항, 나의 호두나무 숲, 공룡 선배의 성, 수현 선배의 시계탑. 멀리서 보기엔 아주 멀쩡했다. 유려하게 꼰 다리를 풀었다. 조금만 더 그러고 있었더라면 다리에 쥐가 났을지도. 오른 다리 위에 손을 올려 가볍게 주물렀다.

 

로비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백색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함이 감돌았다. 소리의 근원지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꿈이었을까, 환청이었을까. 너무나 당연하게도 원혼이라는 선택지를 만들지 않았다. 입술 밖으로 허탈한 웃음이 살짝 새어 나왔다. 정답을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죄책감 따위로 피어오를 감정이라면 이제서야 나타나선 안 되지. 상자 아래로 사뿐하게 뛰어내렸다. 바닥에 쌓인 먼지가 일어났다. 공중에 미세한 먼지가 폴폴 떠다녔다. 옷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그날로부터 벌써 1년이 넘었는데.

 

 

 

라더는 수현 선배의 손에 죽었다. 수현 선배는 주인-어느 순간부터 존칭이 입에 붙지 않더라-의 명령을 받들어 내가 죽였다.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정의할 수 없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가 죽음으로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게 동화였더라면 여기서 책을 덮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동화와 다르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수현 선배 덕분에 공룡 선배와 나는 수명의 존재를 깨달았다. 남은 기간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4년 차인 수현 선배가 라더를 죽였으니, 5년 차가 되는 순간 수명이 다하겠지. 공룡 선배에게는 2년이, 나에게는 3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나보다는 공룡 선배가 더 급해 보였다. 말로만 2년이지, 정확히는 1년 몇 개월인 탓이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던 타이머가 눈앞에 나타났다.

 

당시의 나는 죽음이 무서웠다. 공룡 선배 다음이 내 차례라는 게 저명했으니까. 물론 수현 선배를 죽인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했다. 그래도 수현 선배의 몸을 꿰뚫던 순간에 느낀 손의 감촉.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증오로 가득 찬, 그 사이에 섞인 작은 슬픔을 내보이던 수현 선배의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정확히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성큼 들어섰다. 이에 두려움이라고 이름 붙인 나는 공룡 선배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라더와 수현 선배가 죽은 이후로 주인은 넋이 나갔다. 공룡 선배와 내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펴도 멍때리는 날이 많았다. 솔직히 가망이 없어 보였다. 주인은 삶의 의욕을 잃은 것 같았으니까. 살고 싶다고 외치는 우리를 무시한 채 말이다. 그럼에도 공룡 선배는 포기하지 않았다. 주인의 곁에 앉아 말동무가 되어주었고, 몸에 좋은 식물이 무엇인지 내게 물어왔다. 그것들로 차나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게 공룡 선배의 일상이었다.

 

'주인님이 기운 차리는 날에 우리의 수명을 늘려달라고 간청할 거야.'

 

해피 엔딩을 바라는 공룡 선배의 미소는 너무나도 찬란했다. 어찌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대놓고 말해봤자 알아듣지 못할 게 뻔하니, 주인이 정신 차릴 때까지 기다리는 꼴이 퍽이나…. 아니야, 됐다. 빈말이라도 공룡 선배에게 그런 말은 남기고 싶지 않네. 어쨌든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때의 웃음이 마지막이었다. 몇 개월이 눈 깜빡할 새에 흐르고, 어느덧 성큼 다가온 12월 31일 때문이었다.

 

12월 31일 오전 0시, 주인이 정신을 차렸다. 정확히는 반만 차렸다. 주인은 공룡 선배와 나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공룡 선배의 간청을 귓등으로 넘겼다. 간곡한 호소에도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몇 년 전에 라더를 만들 때처럼 인형을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아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형의 틀이 서서히 잡혀갔다. 인형은 라더와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았다. 그렇지만 라더를 뛰어넘을 만큼의 걸작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주인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공룡 선배와 나는 서서히 죽어갔다.

 

그래, 주인은 미쳤다. 미친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무시하거나, 상대보다 더 미치거나. 나는 전자를 택했다. 처음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다. 나조차도 정의할 수 없는 감정과 공룡 선배의 존재 때문에 함께하자고 한 것뿐이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내일 따윈 없다는 사실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라더가 만들어지기 전? 내가 만들어지기 전? 수현 선배가 만들어지기 전? 아니면 애초부터? 정답은 알 수 없었다. 그냥 모든 게 다 잘못되었다. 엎어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죽어버린 라더와 수현 선배 그리고 죽어가는 공룡 선배만 안 됐지. 불쌍하게도.

 

 

 

발걸음의 목적지는 주인의 공방 앞이었다.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주인의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2층에서 자고 있나 보네. 2층에 시선을 주지 않고, 1층의 작업실로 걸어갔다. 내 몸체만 한 인형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앉아있었다. 아름답다는 단어 하나로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다만 이건 확정지을 수 있겠다. 저 멀리 존재하는 우주의 은하수 한 조각을 떼어다 놓은 것 같다고. 나는 인형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손바닥으로 인형의 왼쪽 뺨을 감쌌다. 백옥 같은 피부는 약간 서늘하면서도 매끄러웠다. 유리는 아닌 것 같고. 사기 종류인가. 인형의 머리칼이 내 손등을 간지럽혔다. 뺨에서 손을 떼고, 머리카락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어찌나 긴지, 인형의 허리에 다다를 정도였다. 라더도 우리와 같은 짧은 머리였는데. 다시금 인형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비단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색은 수현 선배와 같은 검은색이었다. 하지만 검은색은 단순한 검은색이 아닌지라, 여러 각도에 따라 옅은 무지갯빛을 내보였다.

 

인형의 옷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검은색 제복이었다. 단추, 벨트, 소매 등에 쓰인 노란색이 눈에 띄었다. 나도 모르게 인형의 노란 소매를 붙잡았다. 순간, 인형의 소매와 내 소매의 모양새가 닮았다고 생각해 버렸다. 가만히 바라보다 내팽개치듯 손을 놓았다. 아니다. 그건 착각이었다, 분명. 인형은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망토의 끝을 잡고 크게 펄럭였다. 망토 안감에 별자리가 그려져 있었다. 작은 동그라미 하나하나가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망토는 인형의 어깨를 감싸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인형의 머리카락을 살짝 걷어내고, 망토 위에 달린 여분의 천을 확인했다. 바느질된 흔적 따위는 없었다. 처음부터 후드가 달린 망토였다. 인형의 머리카락을 길게 만들었으면서. 짧은 머리라면 모를까, 후드 따윈 거슬릴 게 뻔하잖아. 이건 설계 오류일 것이다, 분명.

 

인형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인형은 눈을 감고 있었다. 양손으로 인형의 왼쪽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곳에 황금이 존재했다. 노란색이라고 표현하기 민망할 정도로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작은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무이-유이무이가 더 올바르려나-한 별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인형의 눈동자만큼은 환한 빛을 낼 것만 같았다. 나는 인형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인형의 옆에 놓인 잡동사니가 눈에 띄었다. 가느다란 끈에 달린 별 모양 장신구. 머리끈이었다. 게다가 한두 개가 아닌 여러 개였다. 어쩐지 머리카락이 길더라니. 푼 것도 좋지만, 묶은 것도 꽤 아름다울 것 같았다. 양손으로 머리끈을 하나씩 들어보았다. 별 모양이 미세하게 차이가 났다. 가장 괜찮아 보이는 머리끈을 인형의 머리 위에 가져다 댔다. 화려했던 라더의 목걸이가 생각났다. 아니야. 착각이야, 분명. 머리끈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 옆에 주인의 글씨체가 담긴 종이가 있었다. 손을 뻗어 종이를 들었다.

 

별. 별도. 별반. 별칭. 샛별. 특별. 유별. 영별.

 

별이 들어가는 단어가 종이를 꽉 채울 정도로 쓰여있었다. 아무리 봐도 인형의 이름 후보가 틀림없었다. 이것 중에서 인형의 이름이 무엇인지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기서 가장 굵게 쓰인 단어. 밑줄을 치고, 동그라미를 여러 번 그린 단어. 노란색 별 모양으로 체크한 단어.

 

각별

 

종이를 내려놓고 인형을, 각별을 쳐다보았다. 각별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책상 위에 앉아있었다. 아마 내일이면 너는 주인의 마법을 받아 눈을 뜨겠지. 각별을 바라보며 느낀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각별이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라더는 정말 싫어했었는데. 제멋대로인 성격 하며, 밤새도록 오르골을 틀어대는 꼴이 마음에 들었다. 한 번쯤은 라더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라더가 죽고 보니, 그렇게까지 싫어한 건 아닌가 싶었다. 각별을 마주하고는 양손을 붙잡았다.

 

너도 그럴까. 주인이 거는 마법은 주인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만약 주인이 원하는 대로 마법이 걸렸다면 라더가 수현 선배를 무시하는 일도, 수현 선배가 라더를 죽이는 일도, 공룡 선배가 도벽을 가지는 일도, 내가 라더를 증오하는 일도 없었겠지. 주인은 분명 너를 아낄 테다. 그런 네가 나를 구해주고 싶다고 말한다면 나는 살 수 있을 것이다. 분명, 나만이. 내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애초에 네가 나를 구해줄 만큼의 성격이 될까. 주인이 만든 인형은 어딘가 전부 다 삐뚤어졌잖아. 네가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잖아. 각별의 손을 놓았다. 차라리 네가 눈을 뜨지 않았으면 했다. 아름다운 네 모습 그대로, 마법이 담기지 않은 단순한 인형의 상태로. 그저 잠자코 있었으면 했다. 망치를 휘두르는 것으로 빈껍데기일 뿐인 각별의 몸을 부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부수지 않았다. 공룡 선배의 선택이라면 모를까. 나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식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혹시 모르니 그건 미리 치워둬야지. 식탁에 다다르자마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은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허공에 머물렀다. 식탁 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 갔지? 주인이 치웠을 리는 없다. 내가 치우지 않았으니, 범인은 한 명이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공룡 선배에게 한 번 물어보려고 했었다. 각별을 부수는 것을 원하냐고. 남겨진 이보다는 떠나갈 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먼저 아닌가. 그런데 내가 모르는 새에 이곳에 왔는데도 각별이 멀쩡하다는 건, 각별을 부수지 않았으면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빈 식탁을 뒤로 하고, 주인의 공방에서 나왔다. 곧장 나의 호두나무 숲에 들어섰다. 부엌에 도착하여 차를 우릴 준비를 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주전자. 찻잔에 올린 거름망. 미리 배합해 둔 찻잎을 거름망에 한 스푼 뿌렸다. 그 위로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었다. 찻잎에서 우러나는 오묘한 빛깔이 투명한 물에 스며들었다. 설마. 공룡 선배가 각별을 두고 그냥 넘어갔을 리가. 내 망치를 휘두를 만큼의 힘이 없어서 그랬겠지. 나한테 부탁할 기운조차 없어서 그랬겠지. 거름망의 손잡이를 잡고 들어 올렸다. 톡, 톡. 거름망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 우러난 찻잎을 버리고, 거름망을 정리했다. 동그란 쟁반 위에 찻잔 접시와 찻잔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음식 덮개를 올렸다.

 

쟁반과 함께 호두나무 숲에서 나왔다. 먼지 날리는 로비가 나를 맞이했다. 목적지는 왼쪽일 텐데도 오른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라더의 어항이 보였다. 사건이 일어났던 날, 산산조각 난 어항은 어느 순간 말끔하게 고쳐졌다. 라더는 이미 죽고 없는데도 관리가 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내 호두나무 숲 맞은편에는 흰색 천으로 덮인 무언가가 선반 위에 올려져 있었다. 라더의 어항만큼은 아니지만, 크기가 꽤 컸다. 딱 봐도 각별의 공간이었다. 이름은 아마 천문대려나. 하여튼 라더도 그렇고, 각별도 그렇고 위치 선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몸을 왼쪽으로 틀어 공룡 선배의 성 앞에 다다랐다. 들어가기 직전, 바로 뒤에 있는 수현 선배의 시계탑을 잠시 바라봤다. 라더의 어항과 다르게 망가진 적도 없으면서, 관리가 되지 않아 어수선하고 더러웠다. 몰려오는 감정을 뒤로 한 채, 공룡 선배의 성에 들어갔다.

 

단정하게 꾸며진 성의 복도가 미로처럼 얽혀있었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공룡 선배의 마트료시카를 찾았다. 노크나 물음 없이 마트료시카 안에 바로 들어섰다. 발이 땅에 닿았다는 느낌과 함께, 바닥에 가만히 앉아있는 공룡 선배가 보였다. 먼 거리가 아닌데도 공룡 선배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얼굴보다도 공룡 선배 주위로 어지럽게 쌓인 잡동사니가 눈에 띄었다. 개인 공간이었을 마트료시카는 어느새 창고처럼 변했다. 적당히 포장해서 창고지, 사실은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마트료시카 내부의 변화를 알아차렸던 언젠가, 이곳을 정리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긴 했었다. 그렇지만 물건이 너무 많아서 손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단순히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수명이 다해감을 느낄수록 공룡 선배의 도벽은 점점 더 심해졌다. 라더가 죽었을 당시, 공룡 선배는 주인에게 도벽을 들켰었다. 그래서였나. 주인의 정신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할 때까지만 해도 도벽을 자제하는 듯했다. 억제가 풀린 건, 주인이 각별을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주인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물건을 훔쳐댔다. 이후에는 내가 옆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물건을 훔쳤다. -주인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몰랐다. 아마도.- 손길은 점점 더 대담해지면서 기어코 주인의 앞에서 물건을 훔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룡 선배는 상대보다 더 미치는 걸 택했다. 현장을 마주할 때마다 주인은 공룡 선배에게 한소리했다. 말싸움을 빙자한 토론의 장이 열렸다. 다만 그건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공룡 선배의 도벽을 고치는 것보다 외면하는 게 더 편하고 빠르니까. 공룡 선배의 호소를 무시하던 것처럼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주인은 공룡 선배의 행동에 반응하지 않았다. 공룡 선배는 계속해서 주인의 물건을 훔쳤다. 보관할 수 있는 장소야, 단 한 곳밖에 없었다. 주인도 알았겠지.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해결-끝날-될 일이라는 것을.

 

'덕개야, 너는.'

 

아직은 공룡 선배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던 시절. 공룡 선배는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었다. 훔친 찻잔과 접시를 양손에 든 채였다. 하지만 말끝을 늘이더니,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애써 지은 어설픈 웃음과 함께였다. 진작 삶을 포기한 나는 공룡 선배의 뒷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았다. 구태여 말하려던 것을 캐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왜 지금 떠올렸지. 지금의 공룡 선배는 기억도 못할 텐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발치에 무언가가 툭 하고 걸렸다. 이어서 데구루루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앞서나간 오른발을 필두로 시선을 이어갔다. 노란색 눈동자가 보였다. 별의별 것을 다 훔친 공룡 선배라지만, 설마 각별의 부품을 훔쳤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얼핏 봐도 알 수 있었다. 공룡 선배가 훔친 눈동자는 틀림없는 완성품이었다. 어느 인형에 넣어도 아름다운 걸작이 될 터였다. 다만 각별의 눈동자는 저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공룡 선배는 각별의 미완성품을 훔친 걸까, 아니면 완성품을 훔친 걸까. 노란색 눈동자를 조용히 응시하다 발끝으로 저 멀리 굴려 보냈다. 알고 있을까. 공룡 선배의 선택이 각별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걸.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까지 다가갔다. 공룡 선배는 고개를 푹 숙인 상태였다. 그 시선 끝에 존재하는 건 찻잔 접시 위에 놓인 찻잔 하나였다. 구석에 쌓인 찻잔만 여러 개였다. 그렇지만 나는 이게 구석에서 꺼내온 찻잔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찻잔 속에 남겨진 홍차 한 방울이 말라비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세를 낮춰 왼 다리만 꿇어앉았다. 공룡 선배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쟁반을 들고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분히 눈을 깜빡였다. 수현 선배가 라더를 죽였다는 사실과 공룡 선배가 도벽이 있었다는 사실에 가려진 덕분에 나의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식물 전문 관리인 덕개한테 가서 차를 내어 달라고-.'

 

그날, 내가 주인과 라더의 차에 수면제를 탔다는 사실. 증오는 장난으로 이어졌고, 최종적으로는 죽음이 되었다. 당장 알아낸 사실만을 풀어내는 게 먼저였을까. 그렇게 라더를 죽인 범인만을 찾는 게 먼저였을까.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분명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내가 수면제를 타지 않았더라면 죽음이 될 가능성도 작아졌을 것 아닌가. 그런데도 주인은 결과를 택했다. 고작 범인 찾기에 눈이 먼 나머지 아무도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공룡 선배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후로도 종종 주인의 차에 수면제를 탔다. 이유는, 글쎄. 장난이자, 화풀이였나. 내가 공룡 선배의 도벽을 주인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처럼, 공룡 선배도 나의 행위를 주인에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상황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각별의 부품을 대체 어떻게 훔쳤겠는가. 아무리 관심 없는 주인이라지만, 각별의 부품을 대놓고 훔치는 걸 보고 있지만은 않았을 텐데. 뭐, 그것도 이제는 전부 다 끝이었다.

 

수명이 다하게 되면 아프려나. 누구보다도 죽음과 가까이 지냈으면서, 실제로는 단 한 번도 죽음을 겪지 못한 나다. 덕분에 아는 것이라고는 단어의 의미밖에 없었다. 최근 몇 주간, 공룡 선배는 어떠한 감정 따위를 내비치지 않았다. 제대로 움직이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공룡 선배는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의욕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수명이 다해감에 따라 움직일 기운조차 없는 것일까. 정답은 몰랐다. 그래도 이건 알았다.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공룡 선배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공룡 선배 앞에 놓인 찻잔 접시와 찻잔을 옆으로 치웠다. 내 움직임에도 공룡 선배는 꼼짝하지 않았다. 잠은 죽음의 체험판이라지. 들고 있던 쟁반을 공룡 선배 앞에 내려놓았다. 덮개를 걷어내자, 갇혀있던 김이 한꺼번에 퍼졌다. 아직 완전히 식지 않았는지, 갈색 홍차가 담긴 찻잔 위로 옅은 김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제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에요."

 

선택은 공룡 선배의 몫이었다.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스러질 것인가. 그 순간을 회피하여 잠에 빠져들 것인가. 솔직히 공룡 선배는 좋은 선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쁜 선배도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면서 왜 홍차를 건넬 마음이 들었나 싶었다. 그런 애매한 감정을 가졌기에 홍차를 건네줄 수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라더나 수현 선배 때는 그러지 않았으니. 애초에 특별한 이유 따윈 없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동정심이 들었을 수도. 혹은 두려움이거나. 끝까지 공룡 선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공룡 선배에게 뭐라도 묻고 싶었다. 지금 어떤 기분이에요? 죽을 만큼 아파요? 내가 대신 각별을 부숴줄까요? 하지만 무엇을 물어도 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순간 내 왼쪽 손목이 턱 하고 잡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균형을 유지하다 그대로 다시 앉았다. 공룡 선배의 오른손이 내 왼쪽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을 통해 압력이 느껴졌다. 공룡 선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의 다 스러진 탓에 공허한 눈동자가 보였다. 생기 따윈 하나도 없었다. 신체도, 영혼도 죽어버리기 직전 같았다.

 

                  우리

"덕개야, 너는. 나처럼 살지 마."

 

네 선배이자, 친우로서 내게 해줄 마지막 조언이야. 뒷말은 입으로 내뱉지 않았다. 다만 텅 비어버린 눈동자에서 더 말하지 못한 언어를 느꼈다. 내 손목을 감싸던 공룡 선배의 손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곧이어 힘없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내가 우려준 홍차 바로 옆이었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까와 다르게 이번엔 고개를 떨구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나를 배웅하려는 것인지, 떨굴 힘조차 없는 것인지. 이유 따윈 몰랐다. 여기서 무얼 덧붙여야 하나. 알겠다? 고맙다? 미안하다? 내일 보자? 그게 무슨 소용인가. 공룡 선배의 눈동자에 내가 비쳐 보였다.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다. 아니다. 속으로도 침착했을 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트료시카를 빠져나왔다. 그대로 공룡 선배의 숲도 빠져나왔다. 공룡 선배의 포괄적인 말에 각별을 부수지 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바로 깨달았다. 어째서? 진작 포기한 나와는 다르게 그렇게나 살기를 원해놓고선. 본인은 그른 것 같으니 이제 와서 나보고 각별의 도움을 받으라고?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라고? 손이 덜덜 떨렸다. 휘몰아치는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 대신, 아주 희미한 초침 소리가 들렸다. 잠시 멈칫했다.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품속에서 자연스럽게 회중시계를 꺼냈다. 깔끔한 민무늬에 뚜껑 닫힌 노란색 회중시계. 수현 선배의 리본에 달린 시계가 떠올랐다. 당연한 소리였다. 이건 수현 선배의 것이니까. 물론, 수현 선배가 지니던 것은 산산조각 난 지 오래지만.

 

라더와 수현 선배가 죽고, 수현 선배의 시계탑이 아직은 멀끔했을 시절. 나는 시계탑에 들어가 수현 선배의 시계를 하나 훔쳤다. 수많은 시계 중에서 이걸 훔친 이유는 간단했다. 자동 태엽 시계라서. 관리할 필요 없이 가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계속 작동하길래 이걸 택했다. -수현 선배의 리본에 달린 시계와 비슷한 건, 아마도 우연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지.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 정도는 대충 알고 있잖아. 내가 이걸 왜 훔쳤더라. 아무래도 공룡 선배에게서 도벽이 옮았나 보다.

 

뚜껑 닫힌 회중시계를 빤히 바라보았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로비를 가득 채웠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겨 내가 앉아있었던 상자 곁으로 다가섰다. 몸의 중심을 깨고, 상자에 등을 기댔다. 상자가 나의 무게를 잘 받쳐주었다. 로비에 어지럽게 쌓인 상자가 시야에 잡혔다. 구석진 곳엔 거미줄이 가득했다. 로비를 가로지르듯 설치된 선반 위에는 모두의 공간이 자리했다. 라더의 어항, 각별의 천문대, 나의 호두나무 숲, 공룡 선배의 성, 수현 선배의 시계탑. 멀쩡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뒤섞였다. 손을 뻗어 회중시계로 로비의 모습을 가렸다. 수현 선배, 공룡 선배는 자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후일을 택했어요. 만약 수현 선배였어도 그랬을 건가요. 당연하게도 답변은 없었다. 수현 선배가 죽은 그날로부터 0시마다 들리던 시계탑의 종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간다. 최종장을 향하여. 내일이 되면 공룡 선배의 수명은 다할 것이다. 각별은 주인에게 마법을 받아 눈을 뜨겠지. 나의 수명은 그날로부터 1년이다. 이제까지 동일한 상황이 두 번 반복됐다. 세 번의 반복이 일어나리라 확정 짓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에게 내일 따윈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시작의 마지막에 머물렀다. 백색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공간. 희미한 시계 초침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회중시계 위에 달린 버튼을 눌러 뚜껑을 열었다. 12월 31일 23시 59분이었다.

1년의 마지막 날, 12월 31일 10인 뜰팁 합작
-2023.12.31-


주최자

@@cb0630 으레
@dreamtown_1167 돌멩이




이번 합작은 1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을 주제로

그림 파트에서 7분
, 글 파트에서 3분으로

총 10분께서 참여자로 함께하시게 됐습니다.

모두 각자의 구상을 바탕으로 멋진 작품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약 2개월 동안 고생해주신 참여자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202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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